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쌍령 전투 (문단 편집) === 조선군의 병력 규모 추정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K9L3BmimrFM)] }}} || || {{{#000000 '''24분 50초'''부터 쌍령 전투 당시 조선군의 병력 규모에 관한 자세한 설명들이 나온다. }}} || [[https://blog.naver.com/kkumi17cs1013/221180228474|쌍령 전투에서 과연 조선군은 4만이었는가에 대한 고찰]] [[https://kirang.tistory.com/721|병자호란 쌍령 전투는 정말 300대 4만이 싸워 진 전투인가(2)-전투의 전개]] 단행본 수준으로 병자호란을 정밀하게 재구성한 유재성 선생의 ‘병자호란사’(1986)에서는 쌍령전투에 수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지만 당시 경상도 총병력을 8000명으로 간주한후 좌우병사의 선봉부대를 2000명, 경상관찰사 심연의 본진 병력 규모를 6000명이라고 계산하고 있다. 참전 조선군 4만명을 기준으로 전투를 바라보는 관점과는 기본 뼈대에서 부터 차이가 나는 것이다. [[http://egloos.zum.com/lyuen/v/5417683|출처]] '''쌍령 전투에 참전한 조선군 병력 수가 3만~4만명이라는 설이 널리 퍼져있다. 그러나 이 내용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첫째, 당시 조선의 군사 체제에서 경상도 한 지역에서 단기간에 급히 모은 병력이 3~4만 명에 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둘째, 전장이 되었던 쌍령은 지형이 상당히 협소하여 3~4만 명이나 되는 군대가 진을 칠 수 있는 곳인지 의문이 든다는 점이다. 셋째, 비교적 상세하게 전하고 있는 쌍령 전투의 전개 내용을 보았을 때 도저히 그 정도의 대규모 전투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제로 다른 도에서 동원된 근왕군 병력 수를 보면 대개 7,000~8,000명 정도로 파악된다. 유독 경상도에서만 다른 지역의 몇 배에 달하는 병력이 동원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적의 소규모 병력 난입에 공황 상태에 빠져 무너지는 과정을 보면 아무리 훈련이 되지 않은 병력이라 하더라도 3~4만에 달하는 군세였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물론 3~4만 병력을 운운하는 내용이 조선시대 만들어진 여러 문헌들에 기재된 것은 분명하므로, 당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인식을 가졌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공인된 기록이 아닌 이상 당시 사람들이 풍문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부정확한 소문이 반복적으로 옮겨졌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https://kirang.tistory.com/721|출처]] > 강도(江都)의 서리(書吏) 한여종(韓汝宗)이 장계를 가지고 들어와서 말을 전하였다. > > "도원수와 부원수는 아직 해서 산성(海西山城)에 있습니다. 적병이 잇따라 오므로 도원수가 황해 감사와 함께 병사를 보내어 요격하여서 동선(洞仙)에서 깨트렸습니다. '''경상 병사 민영(閔栐)은 어영군(御營軍) 8천'''과 본도의 병마(兵馬)를 거느리고 23일에 충주(忠州) 수교(水橋)에 도착하였습니다." >----- > -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412030_005|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30일 경자 5번째기사]] 이와 관련해 당시 실제 병력 수를 가늠할 수 있는 자료들이 있다. 《인조실록》을 보면 “경상 병사 민영이 어영군 8,000과 본도 병마를 이끌고 23일에 충주 수교에 도착했다”는 보고가 확인된다. 그런데 3~4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설명하면서 ‘어영군 8,000명과 본도 병마’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또한 《숙종실록》을 보면 정언(正言) 김홍복(金洪福)이 “험천(險川)의 전쟁에서 사졸(士卒)로서 죽은 자가 쌍령에 못지않고[險川之役 士卒死者 不下於雙嶺]……”라고 임금에게 아뢴 내용이 확인된다. 이는 수사적 성격이 강한 문장이지만, 충청도 근왕병들이 패배한 험천 전투에서의 전사자가 쌍령 전투의 전사자와 그렇게 큰 격차가 난다고 인식하지는 않는 인상이다. 이를 바탕으로 추측해 보면 실제 동원된 경상도 근왕군의 수 역시 다른 지역과 비슷하게 8,000명을 웃도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여겨지는 바이다. 게다가 후방에 머무르며 쌍령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경상도 관찰사 심연의 병력과 강행군을 하는 과정에서 낙오되었을 병력도 감안해야 하므로, 실제 쌍령 전투에 투입된 조선군 숫자는 수천 명 수준이었으리라 짐작된다. [[https://kirang.tistory.com/721|출처]] 그렇다면 쌍령 전투에서 허완과 민영이 지휘한 군사가 3~4만 명이라는 이야기는 어떻게 나온 것일까.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는 전국에 근왕군을 보내라고 전교하였는데, 경기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의 근왕군은 사실상 남한산성 근처까지 오지 못하였다. 병력의 일부라도 남한산성 부근까지 진출하여 전투를 수행한 근왕군은 강원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4개 지역 근왕군뿐인데, 한 도의 근왕군 숫자가 8,000명 가량이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남한산성에서 전투를 벌인 4개 지역의 근왕군 수를 모두 합치면 3만 명을 웃돌게 된다. 그렇다면 병자호란 당시 가장 대표적인 패전이라 할 수 있는 쌍령 전투에서 이 병력 전부가 전몰된 것처럼 오도되어 사람들 사이에 퍼졌을 수도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이는 《하담파적록》에서 쌍령 전투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닌 충청도 병마절도사 이의배를 한데 묶어서 쌍령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서술한 점을 통해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은 '''3~4만 명이 실제로 동원된 숫자가 아니라 '동원되었어야 할 숫자'였을 가능성이다.''' 근왕병의 동원은 대단히 짧은 기간 동안 급하게 이루어졌기에 그 과정에서 군적에 따른 병력 동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전후 책임을 두려워한 각 지역의 수령 등 관련자들이 자신이 동원한 병력 수를 부풀려서 주장했을 수도 있다. [[https://kirang.tistory.com/721|출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